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바스 왕조 (문단 편집) === 의료 === >병원은 환자가 회복될 때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환자를 보호해야 한다. 먼 곳에서 온 이든 가까운 곳에서 온 이든, 현지인이든 외지인이든, 강건한 자이건 약한 자이건, 천한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직업이 있는 자이든 무직자이든, 눈이 먼 사람이라도, 몸이 아픈 사람이라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든 치료비는 병원 측에서 부담해야 한다'''. 환자들은 병원에 진료비를 지불할 의무가 없으며 돈을 내지 않았다고 간접적으로 눈치를 주거나 무례하게 구는 일도 없다. > >당시 아바스 왕조의 '''무상의료'''를 다룬 글. 아바스 왕조의 의료 기술은 시대를 감안할 때 대단히 훌륭한 수준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이슬람 병원은 805년 경 [[하룬 알 라시드]]가 [[바그다드]]에 세운 것으로 982년에는 [[부와이 왕조]]의 주도로 짓긴 했지만 어쨌든 바그다드에 최대 규모의 병상이 들어섰다. 10세기까지 바그다드 도시 한 군데에만 10개가 넘는 병원들이 새로 신축되었으며 [[다마스쿠스]]에는 6개의 병원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군인 병상이나 황실 전용 병상이긴 했지만 이정도의 병원이 있다는 건 그만큼 의료보건 수준이 높다는 걸 의미했다. 당시 병원은 전신질환, 외과, 정형외과 등 진료 부문이 각각 나뉘었고 대형병원일수록 진료하는 과가 다양했다. '전신질환'은 오늘날의 [[내과]]에 해당하며 열, 감염, 소화기 문제 등 하위 부문들로 나뉘어졌다. 병원은 일반적으로 [[주치의]]이자 학장직을 겸임하는 대표 의사, 그리고 그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비의료 행정관 '샤이크 사이달라니', 수석 약사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꾸려나갔다. 이들만으로 병원이 굴러가는건 아니었기에 청결만을 담당하는 위생 검사관과 회계사, 기타 행정관리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근무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병원은 보통 매일 밤 해가 지면 문을 닫았으나 10세기 경에 24시간 내내 진료하는 병원을 따로 두도록 의무화했다고 한다. 꼭 병원이 도시에 고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금요일마다 도시 광장이나 모스크에 모여 대규모 설교를 듣거나 예배를 하는데, 이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레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의사들은 응급사고가 일어났을 때 곧바로 달려가기 위해 응급진료소를 차려놓고 의사를 상시대기시켜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외딴 지역의 의료 서비스를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의사와 약사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이동식 진료소를 꾸려 주기적으로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도록 만들었고, 심지어 10세기 초 경에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감옥 시설에도 죄수들을 위한 병원을 차려줬다. 당시 죄수들은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걸 생각하면 시대적으로도 엄청나게 앞선 발상이었다. [[카이로]]에는 세계 최초의 정신병원이 세워졌고 시리아 [[알레포]]에는 풍부한 빛, 신선한 공기, 흐르는 물 및 음악 따위로 정신병 환자를 치료했다. [[파일:Abulcasis_Islamic_physician-SPL.jpg|width=500]] 환자를 진료하는 무슬림 의사의 모습. 이 시대의 의료 시스템에는 놀랍게도 '''의사 면허'''라는게 필요했다. 당시 웬만한 문화권들은 동서양의 구분없이 의사 면허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는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들에서는 의학 학위를 소지해야만 진료를 공식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의대생들은 의사와 직접 동행하고 진료를 보조하며 경험을 쌓았다. 학위를 따고 싶다면 칼리파가 지정한 지방 의료 책임자 앞에서 시험을 치면 된다. 시험은 2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면허를 받고 싶어하는 분야에 관하여 [[논문]]을 작성해 책임자에게 검사를 받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직접 책임자와 면접을 하면서 그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 두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만 의사 면허가 주어졌다. 의사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일했으며 급여도 딱 정해져 있었다. 의료의 질을 어느 정도 수준에 맞춰놓기 위해 의사가 치료하던 환자가 죽으면 가족이 다른 의사들에게 주치의의 처방전을 제시하고 해당 처방이 그 환자에게 올바른 것이었는가 따지도록 했다. 환자의 죽음이 막을 수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가려 의사의 자격이 없는 사람을 쫒아내고자 한 목적이었다. 남자 위주의 이슬람권에서 당연히 대다수의 의사들은 남자였으나 여의사들도 의외로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산부인과]]의 존재 때문이었다. 산부인과 관련 진료를 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음부를 보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자들이 제 여인들을 외간 남자들에게 함부로 보여주기를 꺼렸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은 여자 의사에게 진료를 맡긴 것이었다. 산부인과 뿐만 아니라 아예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걸 싫어하는 남자들도 많아서 이런 남자들을 위해 여의사들만 근무하는 여성 전용 병원도 따로 있었다. 맨 위에도 나와있는 내용인데, 아바스 왕조와 [[이슬람 황금기]]가 절정을 찍던 시기에는 '''무상의료'''를 시행하기까지 했다. 자금은 모두 병원의 자선재단이 지급했고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 [[비마리스탄]]에 찾아와 무료로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 서비스는 모든 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고 이집트에서는 매일 4천명에 달하는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한다. 물론 완전 공짜로 해주는건 아니어서, 환자들이 감사의 표시로 의사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고 일부 실력이 특출난 의사들은 따로 선물이나 재화를 받기도 했다. 다만 시대를 감안했을 때 무상의료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중세치고는 확실히 엄청난 의료시스템이었음이 틀림없다. [[약학]] 역시 의학의 발전과 함께 큰 진전을 이루었다. 가장 저명한 약학자는 '유한나 이븐 마사와이'라는 인물로 777년 약사의 아들로 태어나 [[바그다드]]에서 공부했다. 이후 바그다드에 있는 병원의 원장이 되어 4명의 칼리파들을 치료하는 주치의라는 명예를 누렸고 다양한 그리스 의학서를 아랍어, 시리아어로 번역하는 업적을 남겼다. 특히 약학과 해부학에 소질이 굉장히 뛰어났는데, 그를 평소 좋아하던 [[알 무타심]]은 그가 해부할 수 있도록 [[유인원]]들을 잡아서 선물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마사와이로 대표되는 아바스 약학은 8세기 경에 독립적인 약국이 세워지며 이미 [[의약분업]]의 수준까지 이르렀고 [[연금술]]의 발전과 함께 약학 역시 발전했다. [[쿠란]]에서 약의 청결함과 위생을 강조하고 있었던 터라, 매년 '무타시브'라는 정부 감찰관이 내려와 약국들의 위생을 관리했다. 의사와 약사의 업무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고 약사 역시 면허 소지자만 할 수 있는 직업이라 다른 사람이 함부로 약사 행위를 하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외과 수술도 유명한데 중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수준의 수술도 이루어진 바 있다. 10세기 경 아랍 의사 '아부 알 카심 알 자라위(أبو القاسم خلف بن العباس الزهراوي,)[* 생몰은 936 ~ 1013으로 에스파냐 출신 아랍인]는 '수술의 아버지'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여성형 유방]] 절제술'''과 [[유방암]] 치료를 위한 '''세계 최초의 유방 절제술'''을 집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갑상선]] 절제술'''을 성공시켰으며 수술에 사용되는 278개의 기구 목록이 포함된 '내과 의사 매뉴얼'을 망라한 3권의 수술 교과서를 저술했다. 그야말로 아랍 수술의 기초를 놓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 외과에만 업적이 있는게 아니라 [[혈우병]]의 유전적 특성을 규명하는가 하면 자궁외임신의 하위 유형인 복부 임신을 처음으로 기술했고 [[마비]]의 근본 원인을 최초로 발견했다. 게다가 [[제왕절개]]와 [[백내장]] 수술을 위한 도구를 개발하는 업적도 남겼다. 그의 저작들은 훗날 유럽에 건너가 500년 동안 최고의 수술 참고서 대접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